»잊지 않겠습니다.

박정희는 혈서를 썼다 3 - 조갑제 옹의 일갈을 기다리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박정희 혈서론을 최초로 세상에 퍼트린 조갑제의 괴작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혈서론 부분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솔까말 정말 박정희 혈서론을 퍼트린 원흉은 어처구니없게도 조갑제다. 사실 혈서에 관련된 기사가 나왔을 때 우리의 조갑제 선생이 뭐라고 한마디 할까 정말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일언반구 반응이 없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조갑제를 원망하거나, 조갑제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극우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놀랍다. 조갑제가 이제와서 "유증선은 거짓말을 한것이고, 나는 속았다'라고 하면 사실 상황은 급 반전된다. 혈서 박정희 선생의 근거가 되는 두 축은 주관적 증언 - "유증선 증언"과 이번에 보고된 객관적 증언 - "만주일보" 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만주일보 기사에서 보고 제기된 '만주일보 기사가 조작'이라는 주장 중 상당수는 조갑제의 성실한 보고를 인정하다면 대부분 납득된다. (이는 아래에서 더 설명하자)

그러니 아무리 박정희에 대한 혐오감이 있음을 인정하는 나라도 조갑제가 말을 바꾼다면, 다시 한번 겸허하게 증거를 검토해야 할것이다. 그러므로 조옹의 발언을 기다려 보면서 일단 조갑제의 거대한 떡밥(혈서론)을 읽어보자 ^^ 

조갑제가 말한 혈서론 원문 바로보기

조갑제닷컴에서 원문보기가 싫고 게으른 분을 위한 수록인용 (저작권의 출저표기 : 조갑제닷컴 / 조갑제)
>> 부분은 조갑제의 명문에 대한 나의 각주(의견)이다

"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滿軍에 갔다" : 연재5/교사의 길에서 군인의 길로 : 趙甲濟    
 
나는 박정희를 '교사, 군인, 혁명가'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이력과 性格이 한 몸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국민들을 군대식으로 가르치고 국가를 혁명적으로 改造한 사람이다. 그가 문경 산골의 국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던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1)

>> (1) 유증선이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에 혈서론을 증언을 했을거라는 주장과 달리 오히려 조갑제는 유증선의 증언을 매우 신빙성 있게 판단하고 있다. 사실 조갑제가 아니면 우리가 유증선의 존재를 알 수조차 없을 것이다. 조갑제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진짜로!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 초로서 박정희 선생이 근무 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同宿(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생활비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 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大車輪(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 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 있는 것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노래 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했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通說(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2)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 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3)

>> (2) 유증선의 증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시점 부분이다. 그런데 신문기사에 따르면 이 주장이 옳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박정희가 두번 편지를 보냈다는 39년 3월의 만주신문 기사 때문이다.

>> (3) 나이를 조작하려고 했고 고향의 호적은 수정했으나, 아무래도 말썽이 생길것 같아 걱정했다는 것이다. 즉 나이 조작은 시도했으나, 이 방식으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명씨가 주장한대로 사범대 졸 = 하사관 군적 주장이 맞다면 박정희와 유증선이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하사관 군적이 있다고 해봐야, 군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박정희는 판단한것 같고, 조갑제는 이런 사실을 유증선 이외의 다른 증인에서도 확인한다. (아래)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5)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6)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 (5)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하는 청년 구직자의 고민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입사지원조건(스펙)이 안되시는 분은 밤새워 혈서를 연구를 하시라~

>> (6) 유증선의 증언은 몇가지 면에서 이번에 발굴된 사료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증언에서 유증선은 정확하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 (박정희가 혈서를 쓴것)과 자신이 간접 체험한 것 (만주신문에 기사가 났다는 누군가의 전언)을 분리해서 증언하고 있다. 유증선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자기 주장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만주에서 난 신문기사를 나도 봤다고 할 가능성이 있는데, 유증선은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가 말한 盡忠報國 滅私奉公 이라는 혈서의 내용이 이번에 보고된 一死以テ御奉公 이라는 혈서의 "충성강조"라는 내용면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것. 박정희의 혈서 쓰는 스타일(?)이 이러했고 보고된 바대로 두번 응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2차에 걸쳐 혈서를 보냈을 가능성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아무도 박정희의 혈서가 만주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실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유증선은 만주신문에 혈서의 내용이 보도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확인된 점이다. 유증선의 증언이 그런 만주에서 발간되는 신문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격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유증선이 당시 정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7)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 (7) 여기가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박정희가 다른 경쟁 응시자들과 달리 처음부터 만주군내의 고위간부인 지인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았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 의도하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박정희가 다른 수험생들과 공정하게 진행된 선발 (9월 공고, 10월 응시)에 공정하게 응시한 것이 아니라, 아리카와 대좌나 박정희의 시험에 동행했다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강재호와 같은 인적네트워크의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 (강재호의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즉 39년 3월 박정희가 일반에 모르는 만군내의 '일계군관' 모집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2가지 가능성이 된다.

A : 만주신문이 타임머신으로 당시 일반에는 비공개인 '일계군관모집'의 정보를 알아내어 당대의 박정희는 모욕하고 후대의 타임머신의 존재를 눈치채게하여 우리 모두를 농락하기 위해 떡밥으로조작기사를 썼을 경우 (이경우 반드시 타임머신이 필요하다.)

B : 박정희가 일반인들은 알지 못했던 '일계군관모집'의 정보를 만군내의 지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경우. (타임머신따위는 전혀 필요없어! ^^)

A와 B 중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설명인가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챌것이다. 조갑제의 기존 보고는 B의 가장 유력한 보조증거를 이룬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8) 

>> (8) 이것이 전형적으로 폐쇄적인 조직 즉  당시의 만주군에서 사전 협의에 의해 합격자가 사전에 선발되는 내정 과정을 암시한다. 박정희는 혈서와 만군내의 지인들의 추천과 협력에 의해서 정당한 응시과정 이전에 자격자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주 12번)  응시자격을 제공받았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사전 조작을 위해서 39년 3월의 혈서 편지는 따라서 반드시 최대한 빨리빨리 미리 보내져야 했다. 애초부터 정규응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면 인상이 강하게 어필해야 하고 그러자면 스폰서들이 박정희의 가치를 만군내에 어필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을테니까.

우리가 지인이 만약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고하면 이런 저런 사정을 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만주군의 일계군관 모집에 관한 정보가 일반에 공개되기 전에 만주군 사정에 정통한 내부 지원세력이 박정희에게 당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만군내 사정을 알려주었을 개연성은 타임머신의 존재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 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9)

>> (9) 이 부분에 대해서 39년 당시 박정희는 심상소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잘못이라는 주장이 있다. 사실은 1938년 3월 3차 조선교육령으로 보통학교의 학제가 6년제로 바꾸고 심상소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재직했던 학교 정식 명칭은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이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때의 정책 발표 이후의 혼선을 생각하면 당시 보통학교와 심상소학교는 일반에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이런 혼돈은 3차와 4차에 따른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한 것으로 일제하 마지막 7~8년 동안 공립보통학교 -> 공립심상소학교 -> 공립국민학교로 계속 변경되는 바람에 당연한 것이였다. 따라서 39년 3월의 편지에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라고 나오는 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 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봄에 한 3주간 일본시찰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구나’하고 생각했다. 5·16 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통령은 나를 보고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

박정희 선생이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통설과 상반된다. 통설은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교사직을 그만둔 뒤 만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많이 유포되었다. 이 통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滿軍(만주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신화로 발전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說(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 교사 시절에 늘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교장과의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집념의 실천이었다. 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10)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강-울산인>

>> (10) 여기서의 강은 바로 간도특설대의 강재호다. 조갑제가 확인한 이 내용은 유증선의 증언과 구조가 정확히 일치한다. 박정희의 최고회의 의장비서였던 이낙선이 정리한 비망록에도 1) 박정희는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연령초과임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썼고, 2) 그 편지는 만주 신문에 났으며 3) 이 기사 때문에 당시 스폰서가 되어줄 만주군 장교가 생겼다. (만군내에서 이슈가 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채용이 하사관 군적 인정 이라는 공식적 절차가 아니라 <'이렇게 애국정신이 있다고' 만주 신문에 실릴 정도의 편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회고했다. 무명씨의 주장과 달리 박정희는 자신의 나이 문제를 사범대 졸 = 하사관 군적으로 우겨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왜 연령초과에 대해서 안되었는데 라고 했겠는가 무엇보다 이 대목의 압권은-

스폰서로 나선 강재호가 당시의 시험관이었다는 점이다. ^^

즉 혈서가 아니라고 해도 박정희가 만주에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실린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박정희의 부하였던 이낙선도 설마 박정희를 엿먹히려고 이런 증언을 했겠는가? 그러니 틀림없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 좋아하시는 분들 즉시 지금 발견된 박정희 말고 다른 박정희가 혈서없이 보냈지만 만주신문에 실릴만큼의 가치가 있는 내용의 편지를 즉각 찾아보시길. ^^

이낙선 중령이 당시 취재한 내용도 유증선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그때 문경과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권상하(전 대통령 정보비서관)의 증언.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視學(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송했다>
 
 박정희는 권상하 이외에도 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을 패주었다느니 술상을 뒤엎었다느니 싸우고 갔다느니 하는 말들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976년 2월 17일 대통령 공보비서관 鮮于煉(선우연)이 작성하여 박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둔 ‘대통령 이력서’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박 대통령이 읽고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서 ‘道(도) 장학사가 나이가 많은 아리마 교장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혐오를 느낀 것이 교사직 사임 원인의 하나이다’고 했다. 아리마 교장이 여기서는 동정의 대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러면 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질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까. 혹시 자신의 만주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꾸며낸 말이 아닐까. 박정희보다 네 살 위인 누님 박재희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생이 가끔 내 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느 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르지도 않고서 만주로 갔지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 재석에 따르면 박상희는 동생이 안정되고 대우받는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는 항일투사 박상희는 동생의 변절을 허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로서 일본인 교장 및 시학과의 충돌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퍼뜨린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에는 작은 근거가 있듯이 박정희의 신화도 작은 사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시험을 치러 간 시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자 황실광은 박 선생보다는 다섯 살 아래로서 졸업한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다. 1939년 10월 어느 날 하숙집에 갔더니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너하고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나쁜 놈 같으니 센진(鮮人)이 뭐야, 센진이. 그래 놓고도 지서장을 불러와 화해를 하라니.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것으로는 화해 못 한다.”
 
박 선생이 전해준 사연은 아리마 교장이 視學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는데 이런 논리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美英鬼畜(미영귀축)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朴교사가 천황을 들먹이면서 교장을 몰아세우자 아리마가 당황하여 일본 경찰을 중간에 넣어 화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충돌이 우연의 일치로 만주군관학교 시험 시기와 비슷한 때에 발생했기 때문에 ‘항일 의식이 강렬한 박 선생이 악질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로 갔다’는 과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작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傳記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사소한 사연은 어쨌든 이 말이 박정희의 만주행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해답일 것이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11)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12)

>> (11) 당시 강재호가 시험장에 자신이 후원하는 박정희를 인도했다는 증언이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당시 강재호는 이 시험의 시험관이었다. 시험을 감독하는 시험관이 자신이 후원하는 지원생을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자 이건 무엇을 암시할까? 박정희가 새가슴이라는 사실? ^^

>> (12) 이 부분이 진짜 황당하다. 나는 기사를 보고 그렇다면 박정희가 일계 군관으로 채용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만주계 군관으로 발표가 났다.박정희의 만주계 자격 입학은 정말 제약조건이 많았다. (좀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전제를 먼저 하겠다. 2007년경에 중국쪽에서 제기된 주장에 의하면) 당시 만주 신경 군관학교에 만주계로 입학하기 위해서는 3가지가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한다. 첫째 나이 문제(이건 무명씨가 박정희는 하사관 자격이 있기 때문에 혈서를 쓸 필요가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 둘째 만주국에서 태어나고 거주하는 엄연한 만주 국민이어야 한다. 당시 만주에 살던 조선 이주민들은 만주국민이었지만, 박정희는 일본영토였던 반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박정희도 이것저것 알아보던 차에 만주계 응시는 어려우니, 만군내의 지인들에게 들어서 만주계가 안된다면 일계 군관 정보에 빌붙어서라도 시험 볼 기회라도 달라고 사정해볼까 하고 생각한것이 39년 3월의 편지라면 납득이 되는 것이다. 해당 편지에서 이미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쉬운 문제는 아닌데 입학 전에 국적세탁을 잘했다 치고 세째 가장 중요한 문제 - 미혼이어야 한다. 

일견 합리적인 생각이다. 여자생각 못하게 하고 집중해서 가르쳐야 하는 엘리트 장교니까. 지금도 우리 육사는 3금이라고 해서 금혼, 금연, 금주를 하게 하고, 여생도의 경우 재학 중 임신하면 퇴교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군의 이 전통은 일본군에서 온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가 1936년 대구사범대학교 5학년 시절 김호남과 결혼했다는 점이다. 나이는 속이면 되고 국적은 세탁하면 된다. 그런데 아내는? 아내는 어쩌지?

박정희는 아내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중국 쪽의 논거 3가지 조건이 정말 필수였다면 우리는 확인해봐야 한다.

당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학생들 중에, 박정희과 같은 조건 (고령임에도 사범대 출신이기에 만주군에서 하사관 군적을 인정받고, 만주국의 국적문제, 그리고 기혼문제)에서 만주계로 입학한 반도출신 조선인이 과연 몇명이나 되는지. 정말 박정희 같은 케이스가 정말 더 있는지를 말이다. 나는 중국쪽의 매몰찬 반박정희 주장에 되도록 필터를 거쳐서 보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의 주장대로 40년 2기에서 간도특설대 간부 충원을 위해 간도특설대 대원중에 이 3대 조건과 무관하게 16명에게 시험자격을 준사실이 있는지. (그래서 박정희가 같은 특혜를 받았기에 간도특설대 대원으로 활동한게 아니냐는 의심이 중국에선 생겨났다) 어째서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와 동일한 특혜를 받았는지 확인해야 할것이다.

(* 첨하여, 내가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중국쪽의 주장을 다 믿지 않는다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유증선의 증언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유증선은 39년 당시 박정희가 자기 아들의 유호문의 문경보통학교 (심상소학교) 담임이었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선생 유증선이 아들의 담임인 박정희가 간도특설대로 활동하기 위해 학교를 자주 비웠다면 이를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다. 그러니 중국쪽 주장은 팩트 위주로 검토만 하는 것이 좋겠다.)

박정희가 합격했다는 1939년 10월의 신경군관학교 시험이 얼마나 비정상적이였는지.
무엇이 이런 비정상적인 합격을 보장했는지. (혹시 혈서?)
이번에 발표된 사료와 함께 냉정하게 따지는 것이 역사를 논하는 바른 태도일 것이다.

박 선생을 졸졸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 선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는 이들에게 박 선생은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다”면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누어주더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유지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했다. 박정희는 고향에 들렀다가 3월 하순에 구미역 北行線(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백남의는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老眼(노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가 뒤돌아보니 그의 어머니는 흰옷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 결론

내가 낚였을수 있다. 인정한다. 나도 실수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조갑제의 이 혈서론을 다시 읽고나서
39년 3월에 만주에 편지를 보낸 박정희가 바로 우리 모두가 애증하는  박정희라는 확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료조사의 달인 조갑제가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 
조갑제의 신념은 나와 다르지만 그의 글쓰는 태도는 정말 본받을만 하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박정희 혈서론을 뒷받침하는 두개의 사료 유증선의 증언과 만주신문의 기사는 아직 우리가 의문을 품고 있는 점을 정확하게 보완하고 있다. 

실제 사료인 만주신민의 일계군관지망에 관한 것을 박정희가 어떻게 공고 전에 알았을까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당시 군관학교 입학 전에 만군 안에 박정희를 후원하는 고위 군 간부들이 있었다는 배경 증언으로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극우파 여러분들 국민떡밥 혈서론을 뭉겨버리고 싶으면 사실 조갑제를 먼저 쳐라. 그게 순서다.
그러니 나는 정말 조옹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온 대한민국을 혈서론이라는 이 거대한 떡밥을 이 세상에 이토록 신빙성 있게 제시한 당사자로써
조갑제 옹의 한마디를 우리 모두 심각하게 궁금하지 않을수 없다. ^^

by 라이프펜 | 2009/11/07 03:04 | [:시사글:] | 트랙백(2) | 덧글(23)

박정희는 혈서를 썼다 2, 또는 무명씨의 자폭에 대해

박정희考...박정희 혈서 증거자료라는 것을 보고

자. 드디어 사료 좋아하는 무명씨가 자폭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무명씨의 논리에 따르면 만주신문이 박정희가 쓰지도 않은 혈서를 썼다고 조작했다는 것인데, 만주신문이 박정희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고 없던 일을 조작까지 하겠는가. 당시 현실에 욱일승천하는 일제에 충성하겠다는 리얼 스토리가 차고도 넘쳤는데, 뭐하러 허구를 조작해내겠냐고.

전후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명씨가 고민하는 문제의 정답은 이미 해당 신문에 설명되어 있다.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만주신문 1939.3.31. 7면)

이제 증언과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합리적으로 정렬해보자. 즉 편지를 두번째 썼다는 것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2번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번 모두 지원편지에 혈서를 동봉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1. 1938년 5월 박정희는 유증선과 상의하다가 1기 군관학교 만주계 군관부문에 지원편지와 1차 혈서를 써서 지원한다. (유증선의 증언에 따른 조갑제의 리포트) 이때 지원한 것은 39년 1기 만주계 군관이다.
2. 1939년 2월 24일 : 만주군관학교측은 박정희를 쌩까고 떨어뜨려버린다. 그리고 이 사이에 40년도 2기 지원자격 정보가 반도의 박정희 까지 전해진다.( 박정희가 언급하는 2기부터 생긴 일계 군관 지원에 대한 내용)
3. 1939년 3월 29일 : 박정희는 작년에 떨어진 만주계 대신 2기 일계 군관 분야에 지원편지와 2차 혈서를 쓰고 또 지원한다. (만주신문의 '동군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번째' 라는 것은  이 2차 지원편지와 혈서를 뜻한다) 이때 박정희의 편지 내용을 보면, 이번 일계군관에 지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안다. 하지만 한번 죽어서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무리가 있더라도 채용해달라고 한다. 특혜를 요구한 것이다. 나이는 안되도 하사관 군적이라도 인정해 40년 2기 일계 군관 응모에는 자격이 없느냐는 문의를 한 것이고 여기에 2차 혈서를 더해 자신의 인상 강화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3월부터 한 것이다.
4. 1939년 3월 31일 : 당시 넘쳐나던 지원자들 중에서 두번이나 혈서를 써서 지원한 극렬분자는 매우 드물었을테니, 이 사실이 훈훈한 미담으로 간주되어 만주신문에 보도된다. 하지만 만주신문이 확인했듯이 기사가 나오는 시점에서는 박정희의 나이와 군적 모두 인정받지 못해서 대일본 제국에 죽음으로 충성하겠다는 박정희의 간청은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40년 2기생 모집을 하는 39년 응모에는 원칙상 박정희는 지원자격미달 - 해당사항 없음이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혈서를 쓰고 그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는 사실은 반도의 박정희 지인들도 알 정도가 된다 즉 혈서까지 쓴 충성심 강한 반도 출신이 떨어진 것으로 유명해졌다.그리고
5. 1940년 4월 4일 : 기적이 일어난다. 작년에 나이와 군적문제로 듣보잡 취급을 받던 박정희는 제2기로 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유증선의 증언(주관적인 사료)과 만주신문의 보도 (객관적인 사료) 모두 정확히 일치한다. 기존에 알려진 박정희의 혈서내용(1차 혈서 :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과 이번에 알려진 혈서내용 (2차 혈서 :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이 다르다는 것도 혈서가 2개였다면 모두 설명된다.

따라서 무명씨의 혼란은 박정희의 두번의 지원을 오직 단 한번만으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무명씨가 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38년에 뽑지 않았던 <일계 군관>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 기사가 조작이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39년 3월 29일 박정희가 보내서 도착한 편지는 지난 38년(39년도 1기생)도 응모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이번 39년도에 진행하는 (40년 2기 입학 예정)의 일계 군관 응모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 된다.

무명씨의 주장대로라면 만주신문의 박정희 기사는 미담이 아니라 괴담이 된다. ^^ 박정희는 이미 작년에 끝난 응모에 작년에 있지도 않은 부문 (일계군관)에 올해 혈서를 써서 지원하는 놈 = 정신병자다. 이것은 미래의 한국 근대화의 대통령을 미리 모략하려는  만주신문 조작의도인가? ^^ 그러니 무명씨의 만주신문 조작론은 따르면 따를 수록 엄청난 의구심이 생긴다. 만주신문이 박정희가 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내지도 않은 혈서에 있지도 않은 작년도 응시요강(일계 군관)에 관한 내용까지 넣어서 기사를 조작한단 말인가. ^^ 

청년 박정희는 매우 치밀하고 교활한 인물인것 같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에 대한 충성보다 일본에 대한 충성맹세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간파했고 다음해 지원할 때 공략 방식을 변경한것이다! ^^

덧,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무명씨는 좀 더 불쌍한 사람인것 같다. 공부를 하다보면 자신이 오랫동안 쌓아왔던 결과를 부정하는 일들이 생길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잠깐 자존심 상한다고 곡학아세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자신의 학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자백하는 처량한 짓에 불과하다.

여러번 말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나도 그렇다. 내가 믿거나 확신하는 것에 대해서도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면 나도 실수한것이다. (내가 최근에 역사적 의견을 수정한 것은 정조에 대한 심환지 독살설에 대한 사료(정조와 심환지간의 어찰)가 발굴된것이 대표적이다. 나는 과거에는 이덕일의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이었고, 새로 발굴된 사료에 대해 이덕일이 새로운 반론을 던졌지만 이젠 그  해석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이 가장 중요하다. 
잘못에 대해 명백히 솔직히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긍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 조차도 38년의 만주계 지원이라는 잘못을 반성하고, 39년에는 확실하게 입학될 수 있게 일계 지원이라는 참신한 선택으로 행동을 능동적으로 수정하지 않는가 (응?)

자신의 인격도 향상되고 학문에도 새로운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궁극적으로 학문이 더 두터워질수도 있다. 그러나 명백한 잘못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학문도 퇴보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학문을 이루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인 자신의 인격이 추하고 더러워진다.

무명씨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글 쓰며 한평생 공부하겠다는 모든 이들- 특히 나 자신의 경계로 이글을 삼고자 한다.

by 라이프펜 | 2009/11/06 09:16 | [:시사글:] | 트랙백(1) | 핑백(1) | 덧글(59)

박정희는 혈서를 썼다

몇달전에, 박정희考...진충보국 혈서설 떡밥은 여전히 유효한가? 라는 글이 올라온적 있었다.

무명씨의 요지는 "박정희 나이로 충분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혈서로 지원했다는 것은 거짓" 이라는 것. 특히 혈서론이 퍼지게 된 배경은 박정희의 지인이였던 유증선이 증언을 하고 이 증언을 조갑제가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인용하면서 퍼지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해 유증선이 소설을 쓰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건으로 박지만이 소송을 걸었고 이에 대해 민족문제 연구소가 사료 (1939년 3월 13일자 만주일보) 를 공개했다.  원문보기 >>>

공개된 사료에 따르면 무명씨의 주장과는 달리 혈서를 쓰고 나이를 조작하라고 조언한 유증선의 증언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이로써 우리가 알 수있는 역사적 진실은

1) 39년 당시 박정희는 분명히 혈서를 썼다. 만주신문은 수십년뒤 한국에서 친일문제가 불거질 거라는 예상 따위는 못했을테니, 당시의 친일풍조를 붐업하기 위하여 모집요강에도 못드는 고령임에도 혈서까지 쓰는 지원자가 있다는 훈훈한(?) 미담으로 보도한 것이다. 그러니 조작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2) 그러나 나이 문제 때문에 군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면서 군적이 있는자로 한정되어 있기에 라는 신문기사 내용은 당시 박정희도 사범대 졸은 곧 하사관 지위와 동등하다는 통념에 따라 나이가 안되면 자신이 하사관 군적이 있다고 어필할 목적으로 교련검정합격 서류를 낸것 같다. 하지만  무명씨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전문직 군인들에게 박정희의 어설픈 하사관 군적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 또 한가지 박정희는 일계군관 모집 요강을 보고 했다고 하는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당시 신경군관학교에서 '만주계 군관'과 '일계 군관'을 별도로 모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또한 박정희가 애초 부터 반도출신자이나 충성심이 강하다고 판단된 만주군에 지망한 일계 군관의 시범 케이스로 입학했기에 졸업시에도 우수자로 선정되고 일본육사에 진학하도록 처음부터 관리된 것이 아닌가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고령에 군적도 없는 식민지 출신자라도 혈서같은 수단으로 충성심 보여주면 성공할수 있다는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의 완성)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박정희가 만주군 출신이므로, 일본군과는 무관하다는 옹호 주장도 굉장히 옹색해진다. 이하 만주국과 조국(일본)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내용으로 봐서 박정희의 뇌리에는 만주국 = 일본제국 동일체라는 인식이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사실은 만주일보에 보도되었다. 즉 만주의 일본인 오피니언 층들에게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 이후 박정희의 군관학교 입학에 간도특설대 출신의 동향 선배가  개입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반박정희 성향이 강한 중국쪽 사료는 무시하더라도 국내에서 박정희의 동년배 지인 (군인)들 중에서 박정희가 '간도특설대'나 '칠석부대' 소속이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검토와 조사는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4) 다음해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전해에 나이와 군적이 인정이 안되어서 떨어진 자가 다음 해에 특혜로 입학하게 된다면 그것은 혈서로 인한 인상(일제에 대한 충성맹세) 때문일 수 밖에 없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무명씨는 지난번 글에서 박정희 혈서론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에 대해 "뇌의 촉수가 1볼트 정도의 용량을 가진 뭇 네티즌들이 감화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색이 무엇이던, 엄연한 사료에 대해 곡학아세하지 않는 것이 
역사를 논하는 자의 기본자세다.

자 이제 누구 뇌의 촉수가 1 볼트의 용량인지, 
무명씨가 자신의 명백한 잘못에 대해 스스로 사과할 수 있는 인격적인 도량이 있는 자인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by 라이프펜 | 2009/11/05 15:08 | [:시사글:] | 트랙백(2) | 핑백(1) | 덧글(28)

시민이여, 부자시민이 되자

노무현은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처연한 문장은 <성공과 좌절 - 노무현 대통령이 못다 쓴 회고록> 에 나온다. (Page 41) 이 문장 뒤로 노무현 대통령의 글은 서서히 메아리가 끊긴다. <성공과 좌절>은 미완의 회고록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회고록을 집필하기 위해 대략의 얼개를 지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시민주권 이야기라는 큰 제목 뒤에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는 문장이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주제로 한개의 장을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문장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그를 벼랑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뜻을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부자시민이 무엇인지, 어떻게 부자시민이 되어야 하는지. 부자시민이 되면 어째서 좋은지. 알지 못한다. 하여 나는 울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노무현은 이 회고록을 쓰겠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게 되자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놨다. 자신의 실패조차  밣고 지나가라며 쓴 지극히 참람된 회고록에 어째서 시민들이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는 권유를 하였는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 같았다. 아니 모르겠다. 아니 모르지는 않는다. 죽음 너머에서 삶을 공고히 하는 것은 이제 더운 숨을 몰아쉬는 나의 몫이니. 하여 눈물이 내 속에서 부터 차고 올랐다. 그의 마지막 책에서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를 읽는 순간 툭하고 뭔가 터져나갔다.

이제 나는 노무현이 말하는 부자시민을 그의 남은 글에서 유추하여 찾아낼 뿐이다.


부자시민은 근육세포 같은 사람들이다.

관치경제의 시대에는 특혜와 반칙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시장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자유시장 경제에서는 특혜와 반칙이 아니라 창의와 실력으로 정정당당히 경쟁해서 성공한 새로운 시장 주체들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을 존중하고 게임의 규칙을 존중합니다. 창의적 경쟁을 통해 새롭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심 강하고 자기 권리 주장이 분명하고 성공한 만큼 떳떳하게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시민적 자존심을 가지고 자부심이 강하고 원칙을 존중하고 규칙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각, 지도자로서의 도덕적 자각 같은 것을 지닌 사람입니다.

중략

시장에서 자기를 새롭게 성공시킨 많은 사람들, 정정당당한 방법과 창의력으로 피땀 흘려 성공한 사람들이 국가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가지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민주주주의는 계급적 집단에 기초한 정당, 그 정당의 투쟁에 의해서 실현되고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속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도덕적 각성과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자각을 토대로 해서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과 좌절 276~ 278)


한 국가의 경제 경쟁력의 품질은 압축해서 설명하면 곧 그 나라 부자들의 경쟁력이다. 

조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미국 부자 순위 1위 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으로 봐도 무방하다. 두 명 모두 노무현이 말한 스스로의 창조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빌게이츠는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환경을 창조했고 워렌 버핏은 투자의 철학을 완성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몇시간을 강연할 수 있는 철학가의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부자 순위 1위는 이건희다. 불법을 저지른 이건희는 IOC 위원 자격을 스스로 내놔야만 했다. 위대한 부자들은 자신이 부자가 된 철학을 기꺼히 세상과 나눌수 있지만, 이건희는 결코 그럴수가 없다. 이건희가 부자학 강의를 한다면 제 1장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서 형을 제치고라도 재산을 물려받아야 한다가 될테니까.

나는 이건희 따위의 경쟁력이 빌게이츠와 워렌 버칫의 경쟁력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건희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빌게이츠와 워렌버핏과 경쟁해야 했다면, 이건희는 결코 미국 제 1의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미국 부자들은 부시 정권이 상속세를 감세하려고 하자 공화당 정권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런 일까지 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초거대 재력가들이 뉴욕에서 극비리에 모임을 가진 것으로 밝혀져 모임의 배경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미 ABC 방송에 따르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오프라 윈프리, 테드 터너, 조지 소로스 소로스퀀텀펀드 회장 등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지난 5일 뉴욕에서 극비리에 회동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들은 평소 기부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인물들로서 이번 모임도 기부사업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나누기위해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ABC는 “이들은 약 5시간 동안 만나 기부문화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며 "경제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최상의 자선 활동을 전개할지에 대한 포괄적인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이와관련 미국의 자선활동 전문언론매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선단체에 대한 기부액이 현저히 줄고 있는 시점에서 이들은 기부와 자선 활동이 지속돼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내용을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ABC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 참석한 억만장자들은 평소 자선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으며 지난 1996년 이후 이들이 자선사업에 기부한 돈은 무려 700억달러(약 87조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모임을 주도한 인물은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회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 (09.05.23,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 제1위 부자 이건희가 3대 세습을 위해 저지른 명백한 죄에 비한다면 한국의 부자집단이 미국의 부자집단을 이길수 없음은 명확하다. 

미국 경제가 위태롭고, 중국경제가 미국의 상대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엄연한 추세지만,
미국의 부자들이 한국, 중국의 부자들 보다 경쟁력이 있다면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세계 경제의 리더쉽 국가로 자리매김 할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한국의 부자들은 기회주의로 부자가 되었다. 정치인과 관료와 결탁해서 좋은 정보를 얻어내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일반 투자자들보다 조금 더 빨리 투자하고, 그렇게 회수된 이익을 다시 정치권에 보상으로 주는 구조로 너무나 쉽게 부자가 되었다. 부에 대한 내면화된 철학과 의식이 있을리가 없다. 자존감이 약하다. 그러니 외국에서 들여온 명품과 같은 위세품으로 부를 과시하지 않으면 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이 빠진다. 워렌 버핏이 몇십년째 낡은 집에서 헌 차를 고쳐가며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부자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자의 품질은 근육세포와 지방세포의 비유가 가장 적절하다. 진짜 부자는 근육세포와 같아서 몸에 남은 불피요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건강과 활력을 부여하는데 집중한다. 가짜 부자는 지방세포와 같아서 계속 에너지를 축적하고 쌓는 것에만 집중한다. 비만이 결국 한 개체의 비참한 죽음을 부르지만 한국의 가짜 부자들은 탐욕스럽게 살이 찌는 것만을 욕망한다. 그러면서 부자니까 존경해달라고 한다. 웃기지마라. 후덕한 지방덩어리를 존중하는 것은 조선시대나 품음직한 기준이 아닌가. 

노무현의 부자시민론(論)은 결국 근육세포와 같이 이 경제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건강한 에너지인
부유한 시민들을 많아지고, 그래야만 시민주권의 세상, 사람사는 세상이 오리라고 확신한 그의 마지막 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 

그러니 시민들이여.
나는 당신들이 부자시민이 되면 좋겠다.

청문회에 나와서 자신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자들이 리더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존감으로 스스로의 삶을 일구어 성공했기에 타인의 삶도 돌아보고 존중해줄 아는 합리적인 시민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지역이나 사상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나약한 의식을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한국이 경제적 리더쉽을 발휘하는 국가가 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부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이다.
즉 이 나라의 부의 철학이 지방세포적인 관점에서 근육세포적인 관점으로 바뀌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노무현이 말하는 부자시민(근육세포의 부자)들이 이 국가 경제의 헤게머니를 쥐는 것이다.
그런 부자시민들이 정당하게 등장하고 당당하게 발언해야 한다. 부자를 질투하기 때문에 증세정책을 내세우는 것이라는 헛소리에  나는 부자지만 증세를 지지한다는 힘 있는 목소리가 메아리쳐야 한다. 

노무현은 이것을 봤다.  말년의 노무현은 스스로 그런 부자시민이 되려고 했다. 노무현의 의식구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을 희망이라고 내세울 때,  노무현은 자신이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했다.우리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었다. 절망에 빠진 농촌에서도 도시생활 부럽지 않은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노무현은 그저 놀지 않았다. 장군차를 심었다. 썩어가는 강가를 청소했다. 꽥꽥대는 오리들을 동원해 친환경 농사를 지었다. 노공이산이 되고자 했다. 노구로 이 꽉 막힌 세상을 밀어내어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위대한 항산(恒産)을 쌓으려 했다.

항산(恒産) 없이 항심(恒心) 없다. 수천년 전 맹자가 한 이 말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나는 20대 개새끼론(論)은 믿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나날만큼의 책임을 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모든 투자는 투자자에게 귀속된다. 인생의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면 투자자의 책임아닌가! 그러니 20대는 이 공동체에 20%의 책임이 있고, 30대는 30%의 책임이, 40대는 40%의 책임이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시민이 되어서 부자근육세포로 행동할 책임은 직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20대가 아니라  내 또래의 한국인들에게 있다.

정치에서는 일진일퇴의 혼돈은 반복될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세력이 이길수도 있고, 그 다음 선거에서는 질수도 있다.
그런 혼돈의 안개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시민들은 결국 부자시민으로 레벨업 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해서 어떻게 부자시민이 될수 있는지 우리의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칠 수 있는 존경의 당위를 획득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 나라의 지방세포가 아니라, 근육세포가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이긴다.

시민이여 우리 부자시민이 되자.
우리는 땅으로는 더 이상 부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한때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엇으나. 이제는 이 나라의 부자 지방세포들처럼 경제의 건강을 위협하는 방법이다. 지독한 비만이다. 땅으로 부자가 되려거든 차라리 노무현 처럼 땀으로 땅을 일구어 부를 얻는 부자 근육 세포가 되자.

시민이여 우리 부자시민이 되자.
건강한 부자가 되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욕망에 긍정하자. 그래서 부자시민이 될수 있는 창조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스스로 몸을 일으켜세웠다는 강한 자긍심으로 타인의 욕망에 분별심을 가지자. 그래야만 타자의 욕망 중 잘못된 것은 당당하게 지적하고 옳은 것은 긍정하며 무시할 것은 내버려 두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시민이여 우리 부자시민이 되자.
그래서 강해지자. 그리하여 그가 채 이루지 못한  위대한 꿈을 이루자.

by 라이프펜 | 2009/11/03 21:53 | [:시사글:] | 트랙백(1) | 덧글(6)

소니 HDV 캠프에 다녀와서

강원도 홍천 비발디파크에서 열린 소니 HDV 캠프 (이하 소프캠)에 다녀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자리였다. 업무용으로 주로 V1N을 쓰지만 (얼마전에 Z7N이 들어왔다) PP 모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편이였다. 가끔 시네마톤을 쓰거나 하는정도. 이건 런리니어 편집으로 완전히 넘어고 나서의 버릇인데, 찍고 나서 후보정을 주는게 차라리 더 속편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커진것 같다. 하지만 촬영단계부터 적절하게 소스를 제작하는 것이 작업시간을 줄이는데 최선이다. 캡쳐받는 시간도 아까워서 테입리스 시스템 (DR-60)을 쓰면서 프로덕션 단계에서 페인팅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작업습관이다.

그리고 V1N의 매뉴얼을 받지 못해서 읽어보지 못한 것이 원인인데, ^^  Z1N에 Smooth slow Rec 기능이 없다고 들어서, V1N에 없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연을 진행한  Meajima 상과 Egahira 상이 이 기능을 설명하기에 찾아봤더니 V1N에 있었다. ^^

(V1N, Smth Slw Rec 테스트 / 이모드에서 수음은 되지 않음. 뒷부분의 정상촬영시 화면 수음과 비교)

베가스에서 플레이 타임을 조절할 필요없이, 바로 제작할 수 있었는데 몇몇 작업할 때 몰랐다는 것이 아쉽다. ^^ 

팀 과제로 영상물 제작이 있었다. 조건은 1) HXR-MC1을 포함한 영상 제작 2) PP 기능 사용 3) 샷 트랜지션 (Shot transition) 컷  사용 4) 스무스 슬로우 레코딩 컷 사용을 할것. 그러나 과제를 받았을 때가 이미 저녁이어서 야외 촬영밖에 할수 없는 상태였고, 슈퍼게인값을 줘서 테스트했더니 화면이 너무 지글거렸다.  (샷 트랜지션은  자체 버튼이 있는 Z1N 이외에 V1N 에서는 설정후에도 Others > Assign Btn  하단에서 Shot Trans를 ON 해야 Assign 1,2,3에 펑션으로 잡힌다.)  

팀과제는 일단 다른 팀원의 Z5N으로 찍었는데, 찍을수 있는 시간이 별다른 조명을 칠수도 없는 야간 환경 40분밖에 없어서 스토리에 치중한 이야기에 성우 나레이션 (나) 을 현장에서 UWP - C1을 들고 바로 쳐서 제작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 팀원 중에 70대 어르신 (목회자, Z7N 유저)와 22살 공군 일병 (XX 전투단 홍보실 소속, 처장이 출장으로 보내줬다고 함 ^^) 이 있어서, "소니 삼대"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사용하는 소니 캠코더라는 주제로 만들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런리니어 편집이 아니라 테크 - 캠간 리니어 편집으로 제출해야 해서 편집이 제대로 안되었다. 대절망. ^^ 어쩔수 없이 제출을 했는데, 발표 때 보니 내 목소리도 제대로 안들어갔다. 목표가 3등이었는데 이것도 어렵겠구나 했다. 발표 순간에 잠깐 진행 에러가 있어서 엄청 웃었다. 2등 상 발표 때 일본인 심사위원단 (강사와 소니 본사 스탭)이 우리팀을 호명해서 환호하면서 일어났다. 그런데 실수가 있었다면서 우리 팀이 2등이 아니라고 했다. 최하위권 팀을 잘못 발표했다고. ^^ 좋다가 말았다고 웃으면서 앉았다. 행사 스탭간 (한국인 - 일본인) 언어가 안맞아서 생긴 일인줄 알고 이해는 했다. 그런데  최종발표에서 우리팀을 1등이라고 불렀다.

알고봤더니 2등 발표할때  1등 발표하는 줄 알고 일본스탭이 대상인 우리팀을 불렀고, 우리가 환호하자, 수습하기 위해 최하위팀인데 1등으로 불렀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던 것. 기가 막힌 반전이어서 더 드라마틱했다. 우리팀에 취업 때문에 고민하는 대학4학년생 팀원도 배정되었는데, 소니에서 1등상으로 PB 부문 사장 명의 상장을 팀원들에게 줬다. 이 친구가 얼마나 다급하게 소프캠에 지원했는가 하면, 이번 소프캠이 무료초대행사인데 취소자가 생길까봐 참가보증금으로 5만원을 내면 행사뒤에 돌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돈을 받지 못하는줄 알고 그래도 5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응모했다는 것이다. ^^ 작은 상이지만 취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그리하여 캠프 결과, 몇가지 아이템을 득템했다.

우선 행사 스폰서를 한 비디오 플러스의 슬레이트 (일명 딱딱이)다. 두대 이상의 캠을 운용할때는 필요한 악세사리인데 막상 사기는 망설여지는 아이템이다. 레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팀원들이 모두 하나씩 받았고, 어르신(목사님)께는 소니 시계/라디오 세트를 드릴수 있었다.


아 그리고 비디오플러스 6개월 정기구독 신청도 무료로 현장에서 해줬다. 비디오 아트는 1년 웹진 무료 회원신청을 받아준다고 했고.

두번째로 득템한 아이템이 소니의 MDR-XB700 헤드셋이다. 촬영과제 1등상 상품이다. 촬영할 때 헤드셋이 하나 필요했는데 XB700 이라니, 감사할 정도가 아니라 과분한 아이템이다! ^^


세번째 아이템이 바로 문제의 그것이다!


베가스 9.0 번들링 CD!!! 다. 다음달 부터 HVR-S급 (270N 등)의 구입시에 번들로 나간다고 하는데, 돌비 이펙트와 DVD 아키텍쳐만 빼진 정품이다. (11월부터 등품등록 가능한 시리얼넘버) 장비 사실 분들 다음달로 몇일만 미루시길!

결론적으로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캠프였다. 이번에 1기 참여자들이 서포터즈로 참여했는데, 내년에도 하게 되면 서포터로 참여하고 싶다. 그리고 HXR-MC1에는 관심이 많이 간다. 에가시상의 데모 중에도 밴드 드럼 촬영할 때 들어간 테스트 영상이 있었는데, 좁은 무대 등에서 놓고 촬영하면 아주 익사이팅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by 라이프펜 | 2009/10/25 13:33 | [:비디오:]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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